HOME > 커뮤니티 > 김민식의멘트박스
 
제   목 : 3대 멍청이
글쓴이 : 김민식                   등록일 : 2017/05/04
특정한 생각이 굳어버리면 고정관념이 되고 그것이 오랜 세월 패러다임을 지배하면 웬만해서 바뀌지 않는다. ‘돈이 최고다. 남이 부러워해야 성공이다. 늙으면 재미없다.’ 이런 생각들은 굳이 말로 하거나 의식의 표면에 끌어 올리지 않아도 깊은 곳에서 판단과 선택을 지배한다. 그게 그런 게 아니라고 아무리 증거를 들이밀고 설명을 해도 잠시 움찔 할 뿐 곧 제자리로 돌아간다. 관성의 법칙은 정신의 영역에서 제일 확실하게 작동한다. 인간은 잘 안 바뀐다.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거대한 문화 충격이었다. 구약적 사고방식 속에서는 돈 많고 권력 있는 것을 하나님이 주신 복의 증거로 여겼다. 먹고 살기 힘들고 종일 굽실거려야 하는 민초들은 신분상승을 꿈꾸기는커녕 하나님 사랑에서도 소외 된 듯 한 박탈감에 시달려야 했다. 일제시대에도 친일파들은 잘 먹고 잘 살았던 것처럼 로마 식민지 치하에서도 권력구조를 잘 아는 자들은 끈을 붙잡고 누릴 것을 다 누렸다. 전반적인 호황기에는 누구나 잘 되는 것이 당연하지만 전반적인 불황기에 나만 잘되는 것은 상대적으로 정말 신나는 일이다. 야비해 보이긴 하지만 이것이 인지상정 아닌가? 비록 로마의 지배를 받는 암울한 시대였지만 그 와중에도 만족한 생활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축복을 독점 한 듯한 우월감에 우쭐대기 바빴을 것이다.

그런 프라이드를 뿌리부터 흔들어대는 나사렛 청년이 고울 리가 없었다.
‘우린 이대로가 참 좋은데. 우리의 만족과 안정을 위협하는 저 물건을 어떻게 처리하면 좋을까. 선동 질을 못하게 하는 최고의 방법이 있지. 죽이자.’
그들의 잔인한 아이디어는 결국 하나님의 계획을 성취하는 수단이 되었다. 빌라도는 아무 말도 안 했는데 그들은 외쳤다.
‘십자가에 못 박으라. 십자가에 못 박으라.’
참수형도 있고 교수형도 있는데 왜 하필 십자가형인가? 십자가형은 사형수의 고통을 극대화시키는 최악의 행형 방법이다. 예수님을 못 박으라 소리치는 자들 중에는 오병이어를 얻어먹은 자도 있고 나사로의 부활을 목격한 자도 있었으리라. 하나님의 아들은 광야의 놋 뱀처럼 나무에 달리셔야 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 아들을 묶어 제단에 누이고 칼을 치켜들어도 순한 눈망울만 끔뻑 거리던 이삭처럼 성자는 성부의 엄청난 제안을 받들어 순종하셨다. 울음소리 한 번 안내고 털 깍이는 양처럼. 두 개의 가로지른 나무에 사람을 매달아 죽이는 방법은 태초에 하나님의 생각 속에 이미 있었다. 자율적인 예배자를 찾으시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시기로 작정하셨을 때 십자가는 피할 수 없는 선택이셨다.

기독교는 고행의 종교도 아니고 득도의 종교도 아니다. 나를 위해 하나님이 행하신 사건을 바라보고 믿어야 사는 종교다. 그래서 일부 신학자들은 기독교를 종교로 분류하기를 거부 한다. 나를 구원에 어울리는 자로 만들기 위해서 내가 할 일이 없다는 사실은 기독교를 종교 그 이상으로 만들기도 하고 그 이하로 만들기도 한다. 어느 쪽이든지 받아들이는 자의 몫이다.

시14:1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나는 3대 멍청이를 이렇게 꼽는다. 그렇게 백해무익하다 하는데 굳이 담배 피는 사람. 위험하다고 아무리 말려도 난폭운전 하는 사람. 당신의 능력과 신성을 만물을 통해 보여주어도 하나님이 없다 하는 사람.
▲ 이전글
  114   가난이 미학적 자극을 준다
▼ 다음글
  112   비명과 신음도 찬양의 재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