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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믿음을 놀이처럼
글쓴이 : 김민식                   등록일 : 2017/03/10

아이들은 모든 것 뒤에 놀이라는 말을 붙임으로써 손쉽게 즐거운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소꿉놀이 병원놀이 심지어 전쟁놀이까지. 어린아이 같은 자라야 천국의 주인이 될 수 있다는 말은 타당성이 있는 진실이다. 준다면 주는 줄 알고 있다면 있는 줄 아는 순진무구함이 바로 천국의 입장권이다. 교회를 다니면서도 천국에 대하여 반신반의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천국을 구체적인 장소로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성경을 비유와 상징으로 돌려놓는 버릇을 버려야 한다. 당신에게 천국이 추상적이라면 하나님도 추상적인 분이 되고 만다. 천국은 궁극적인 즐거움과 만족이 넘치는 장소다. 티 없이 맑은 행복으로 가득한 장소가 천국이라면 어린아이들이야말로 천국의 주인이 될 자격이 있다.

예수님은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들을 당신께로 부르셨다.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볍다는 선언이야말로 압박감과 스트레스에 찌든 현대인들에게 최고의 복음이다. 인정받기 위해서, 먹고 살기 위해서, 따라 잡기 위해서 몸부림과 안간힘을 반복해야 하는 현대인들에게 안식이란 감히 바랄 수 없는 뜬구름이다. 그래서 감히 천국의 평화까지는 바라지도 못 하고 오락과 여가로 그것을 대신하며 손쉬운 해결책을 택한다. 어른들은 놀이라는 말 대신 전쟁이라는 말을 선호한다. 모든 것 뒤에 전쟁을 붙임으로써 자신을 서사적인 존재로 착각하고 삶의 진실에서 비껴서있는 것에 대한 변명 거리로 삼는다. 어쩌면 심판대 앞에서 사는 동안 충분히 행복하지 못했던 것에 대하여 예수님께 그 이유를 고해야 할 것 같다. 행복이 건강한 믿음의 자연스러운 열매라면 열매를 통해 나무를 보시는 주님께서는 행복과 믿음을 세트로 평가하실 것이다.

사람들은 뜻밖에도 우울과 불안에서 역설적인 안도감을 느끼기도 한다. 싫다 싫다 하면서도 붙들고 놓아주지 않는 것을 보면 쓸모가 있기는 있는 모양이다. 행복의 종교인 기독교 안에서도 고통과 슬픔을 참된 믿음의 증거로 여기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들은 신앙을 자타에게 증명하기 위하여 영혼의 흉터와 멍든 어깨를 훈장처럼 내보인다. 부산스럽게 움직이며 헌신에 집중하느라 본질을 놓치는 마르다 증후군은 단순한 열정을 필요로 하는 조직의 속성에 의해서 강요되고 과장된다. 부모에게 착한 아이로 인정받기 위해서 보여야 했던 모습들이 그대로 신앙 속으로 옮겨진 것이다. 바울이 오직 믿음으로 라고 외쳤을 때 행위를 자랑하던 유대인들은 기함을 했다. 율법 위에 세운 저들의 단단한 기둥을 수수깡으로 만들어버리는 복음의 도전을 순순히 받아들일리는 만무했다. 바울도 다메섹 도상에서 고꾸라진 간증을 여러번 말했다. 복음의 파괴자에서 수호자로 돌아선 전환점은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이었다. 바울의 가슴에서 동시적으로 일어난 거대한 붕괴와 더욱 위대한 융기는 지금 우리 모두의 간증과 일치한다.

그 누구도 지나온 신앙의 궤적이 잘못된 것이라고 인정하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서 누구나 어제의 연장선에서 오늘을 산다. 오늘 내가 옳기 위해서는 그동안의 나도 옳아야 하기 때문이다. 어떤 영화에서 이런 독백이 흘러나왔다. ‘새출발은 어렵지 않다. 떠나는 것이 힘들 뿐이다.’ 은혜를 사모하는 열심은 강력한 이기심과 한 쌍이다. 자신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선물은 내 몸에 명품을 걸쳐주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에 천국을 채워주는 것이다. 만족 중에 최고의 만족, 희락 중에 최고의 희락을 원하는 자만이 진리에 절대적으로 순종한다. 믿음을 전쟁으로 규정하지 말고 놀이라고 생각해 보자. 너무 가벼워지는 것 같은가? 심오한 표정으로 십자가를 질질 끌고가는 모습이 더 가벼워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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