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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중심을 원하시는 하나님
글쓴이 : 김민식                   등록일 : 2016/11/11
크리스천들은 하나님과의 관계라는 말을 많이 사용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라는 말의 그 깊은 의미를 다 헤아리지 못 하는 분들도 그 말이 갖는 무게와 중요성은 인정합니다. 태초에 에덴동산에서 사람이 먼저 하나님으로부터 시선을 돌렸고 그 허물은 상상을 초월하는 문제를 일으켜 오늘까지도 그 원죄의 파편에 우리의 삶과 영혼이 크고 작은 상처를 입고 있습니다. 그 깨어진 관계를 견디지 못 하시는 하나님께서 먼저 화목을 계획하시고 당신의 사랑과 공의를 동시에 만족시키는 구속의 방법을 고안하셨습니다. 그리고 독생자 외아들을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 위에서 죽게 하심으로 영원히 단번에 끝나는 화목 제사를 시행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생명을 얻을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이렇게 풍성해지기 위하여 하나님이 감당하신 희생과 자비의 크고 깊음을 우리는 늘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은혜에 대한 기억력이 나쁘면 구원의 감격이라는 엔진이 자주 꺼집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라는 말이 이렇게 보편적으로 입에 오르게 된 것도 별로 오래 되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웰빙이라는 개념이 온 세상을 뒤덮으면서 하나님과의 관계라는 차원 높은 영적 개념에 더욱 주목하게 된 것은 아닐까 추측이 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병이 들거나 문제가 터지고 난 뒤에 회복을 위하여 내리는 사후 처방전이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온 마음으로 붙들고 지켜야 하는 생명과 축복의 출발점입니다.

십계명의 첫 계명도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관계는 수많은 관계 중에 하나님을 비교적 소중히 여기는 정도의 우선순위 차원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고 지향하고 그리워하며 사랑하라는 절대적 요청이십니다. 바로 이 부분에서 기독교는 만만치 않은 종교가 됩니다.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탐스러운 것이 눈앞에 어른거리는 세상길을 걸어가면서 어떻게 생각과 감각을 하나님에게만 고정할 수 있을까요? 이것이 과연 가능하기나 한 것일까요? 우리에게는 피할 수 없는 일상생활이 있고 일과적 행동을 하다보면 잠시 생각과 감각이 길을 잃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과의 관계를 잘 유지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지속적인 접속력이라기 보다는 민감하고 민첩한 관계회복의 순발력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성전재건의 열망을 품은 신실한 종이었습니다. 그는 아닥사스다 왕의 술 관원으로써 보장된 지위와 안락한 생활에 안주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예루살렘에서 온 하나니라는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 폐허가 된 성전과 성문 이야기를 듣고 그의 마음은 깨어지고 불이 붙습니다. 그의 얼굴에 수색이 있는 것을 본 아닥사스다 왕이 그 이유를 묻습니다. 그동안 왕과의 관계가 얼마나 좋았으면 초강대국의 황제가 신하의 표정을 잃고 마음에 근심이 있느냐고 물어보았을까요? 이 한 장면에서 느헤미야의 진실과 성실한 삶의 모습은 증명이 끝난다고 생각합니다. 잠시 그 장면을 말씀을 통해서 엿보기로 하겠습니다. 느헤미야 2장 3절로 5절입니다.

느2:3 왕께 대답하되 왕은 만세수를 하옵소서 내 조상들의 묘실이 있는 성읍이 이제까지 황폐하고 성문이 불탔사오니 내가 어찌 얼굴에 수심이 없사오리이까 하니
느2:4 왕이 내게 이르시되 그러면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하시기로 내가 곧 하늘의 하나님께 묵도하고
느2:5 왕에게 아뢰되 왕이 만일 좋게 여기시고 종이 왕의 목전에서 은혜를 얻었사오면 나를 유다 땅 나의 조상들의 묘실이 있는 성읍에 보내어 그 성을 건축하게 하옵소서 하였는데

저는 이 말씀 중에서 한 부분이 뜨겁게 와 닿았습니다. 왕의 질문과 자신의 대답 사이라는 짧은 순간에 느헤미야는 하나님의 향한 묵도 과정을 집어넣었습니다. 그는 그날의 분위기와 대화 속에서 상황을 기적으로 몰아가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느낄 수 있었고 자신의 대답 한 마디에 예루살렘의 미래가 달려있음을 감지했습니다. 결정적인 말을 하기 전에 느헤미야는 순간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4: 왕이 내게 이르시되 그러면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하시기로 내가 곧 하늘의 하나님께 묵도하고
그리고 숨 한번 쉬는 정도의 짧은 시간 속에 하나님께 묻고 그 음성을 듣고 마음을 굳히고 생각을 혀로 옮기는 다양한 과정을 멀티태스킹으로 해내었습니다. 그런 영적인 순발력은 그동안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 깊이 잠겨 살아온 동행과 임재의 시간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 다음의 과정은 여러분이 잘 아시다시피 하나님의 간섭 가운데 일사천리로 진행됩니다. 성전을 재건하는 과정에도 수많은 훼방과 도전이 있었지만 결국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최선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느헤미야처럼 순간과 순간 사이에 하나님을 향한 묵도가 채워지는 삶을 우리도 살 수 있을까요? 그가 가능하다면 우리도 가능하고 믿습니다.

일주일에 한 번 주일아침 예배에 참석하는 것으로 하나님에 대한 도리를 다했다고 생각하시지는 않습니까? 그것은 마치 고향에 계신 늙은 부모님에게 명절에 잠깐 방문하는 것으로 자식 된 도리를 다 했다고 생각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과일바구니와 고기 몇 근 그리고 봉투 하나 내밀고 자기들끼리 이리저리 눈빛 신호를 보내다가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탈출하듯이 그 자리를 떠나는 자식들을 보면서 부모님들이 전혀 눈치를 채지 못하실까요? 섭섭한 마음을 감추시고 길 막힌다고 어서가라고 재촉하시는 사랑을 자식들은 온전히 헤아리지 못 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마음을 낭비하는 한 분야가 있습니다. 온종일 생각해도 지치지 않고 물질을 쏟아도 아깝지 않는 자기만의 예루살렘이 있죠. 어떤 사람에게는 그것이 축구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그것이 골프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연애나 승진 그리고 더 멋지게 보이고 싶은 미적 열망입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에게는 연예인이나 운동선수입니다. 박해진이라는 남자 탤런트는 운동화를 너무 좋아해서 1800 켤레를 사 모으기도 했답니다. 앞으로 점점 더 마음을 유혹하는 것들은 늘어날 것입니다. 사단은 뛰어난 연예 기획자처럼 인간의 마음이 어디에서 녹아내리고 어디에서 맥이 풀리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유럽의 축구 경기장이나 아이돌 콘서트에는 열광적인 예배의 모든 속성이 담겨 있습니다. 진리의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썩을 것에 신성을 부여하고 그 앞에 엎드린 무리들이 보입니다.

세상과 세상에 속한 모든 것이 십계명을 통해서 경고하신 다른 신들이 될 수 있습니다. 우상은 나의 묵상의 영역을 장악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훼방합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영원할 수 없는 것에 마음을 빼앗기를 우리를 보시고 “그게 아니야. 그게 아니라구” 외치십니다.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께서 왜 우리 같이 작은 존재들에게 당신의 깊은 속내를 드러내고 또 드러내셨을까요?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은 오늘도 나의 중심을 원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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