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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퐁당 신앙에서 풍덩 신앙으로
글쓴이 : 김민식                   등록일 : 2016/10/28

성경은 참으로 명쾌한 책입니다. 애매한 부분이 없이 세상과 인생의 모든 구석구석에 진리의 조명을 확실하게 비추어줍니다. 희미한 그림자 밑에 보일 듯 말 듯한 부분이 전혀 없습니다. 누구라도 진리 앞에 서면 엑스레이 사진을 찍고 있는 환자처럼 존재의 치부가 허연 뼈와 같이 드러납니다. 성경은 아무도 입에 올리기 싫어하는 죄와 죽음을 아무렇지도 않게 거론함으로써 듣는 사람을 움찔하게 만듭니다. 만약 성경에 조금만 더 애매모호한 융통성이 있었다면 더 많은 사람들이 호감을 품고 성경 가까이 나왔을 것입니다.

성경은 아무 것도 숨기지 않습니다. 구약에서부터 흘러내려오는 예수님의 족보에 거론하기도 부끄러운 여인들이 여럿 있는 것조차 감추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족사의 일부를 숨기고 살아갑니다. 당신의 거룩과 영광에 손상을 입으시고 당신의 백성을 잔인하게 다루시는 하나님의 모습이 구약에 적나라하게 기록되어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듭니다. 너무나 솔직하고 당당한 기록에 많은 사람들이 오히려 당황해합니다. 이런 대범한 노출에도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과 질서를 받아들이기까지는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외국어를 하루아침에 능숙하게 할 수 없듯이 하늘의 언어도 배우기에 시간이 필요합니다. 성경은 어느 곳에서도 우리가 인간적인 지성으로 납득할 때까지 설득하지 않습니다. 알아들을 때까지 자분자분 설명해 주시는 섬세함도 잘 발견되지 않습니다. 나는 사랑의 하나님이고 너는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니 적당한 지점에서 조금씩 양보하고 만나서 대충 사귀자는 말씀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위로 가는 길과 아래로 가는 길을 단순명료하게 우리 눈 앞에 내어 미시며 선택하라고 하십니다. ‘들어올래 나갈래? 올라갈래 내려갈래? 죽을래 살래?’

인간관계적 측면에서도 표현이 너무 분명하고 명확한 사람은 호감을 받지 못 합니다. ‘글쎄, 어쩌면, 아마도’ 이런 표현을 많이 사용하는 사람이 좋은 사람 소리를 듣습니다. 그런 측면으로 본다면 하나님은 상대하기 쉬운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애매해지려는 순간에 반드시 분명할 것을 요구하시는 분입니다. 가나안 전쟁이 거의 마무리 되어 가는 여호수아서 끝 무렵에도 하나님의 전쟁을 수행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이면에는 온갖 우상이 숨어 있었습니다. 여호와의 깃발을 앞세워 진군하면서도 마음에는 온갖 이방신들을 품고 있었습니다. 죽음을 앞둔 여호수아는 최후의 정리 작업에 돌입합니다. 그는 유언적으로 그들에게 선포했습니다. ‘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여호수아는 백성들이 듣기 좋게 이렇게 말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잘들 생각해 보아라. 내 경험상 하나님을 섬김으로써 좋은 일이 많았다. 무엇을 믿든지 자유지만 가급적 현명한 선택을 해 주기 바란다.’ 그러나 이런 표현은 성경의 어조가 아닙니다.

만일 성경이 영생을 약속하지 않고 지상에서 150년의 건강 수명을 약속했다면 사람들은 더 열광했을 것입니다. 만일 성경이 영원한 천국을 제시하지 않고 언덕위의 그림 같은 집을 한 채씩 준다고 제안했다면 더 많은 사람들이 열정적으로 말씀을 따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사람들이 듣기에 황당하기까지 한 영생과 영원을 가감 없이 말하는 책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불편해 하고 의심하고 거북해 합니다. 그들의 유한한 생각과 감각이 이 위대한 개념을 담아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능력은 지식에까지 새로움으로 역사하기 때문에 예전에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을 이해하게 하시고 담을 수 없던 것을 담아내게 하십니다. 만일 여러분이 영생과 천국을 진심으로 긍정할 수 있다면 큰 축복의 실체를 붙잡은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철없는 아이의 눈앞에 1억 원짜리 수표와 만 원짜리 지폐를 동시에 내밀며 하나를 가지라면 어느 것을 잡을까요? 십중팔구 만 원짜리 지폐를 잡을 것입니다. 그것은 눈에 익었고 가게에 들고 가서 사용해 본 적이 있으며 자기의 주변에 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아이의 기호와 만족은 만 원으로 살 수 있는 것에 머물러 있습니다. 루이스의 말대로 인생의 문제는 욕심이 너무 큰 것이 아니라 욕심이 너무 작은 것에 있습니다. 정말 대단한 것을 원할 담력이 없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썩을 것의 노예로 살게 됩니다.

사람들은 영생이라는 엄청난 선물보다는 한 오백년을 더 좋아합니다. 감이 오기 때문입니다. 실감이 나기 때문입니다. 손을 뻗을 만 하기 때문입니다. 만만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이들의 물총으로 거대한 숲을 적실 수 없습니다. 숲은 때때로 소나기를 맞아 흠뻑 젖어야 합니다. 위로부터 내려오는 풍부한 물줄기에 흠뻑 젖어본 기억이 언제입니까? 영혼 깊은 곳에서 만족의 함성이 터져 나오는 경험이 언제였습니까? 내 영혼의 갈망을 주목해 보시기 바랍니다. 표면적으로는 돈과 명예와 멋진 인생을 원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갈망의 심연에는 하나님을 찾는 간절한 비명이 들어있습니다. 인간은 근원적으로 쾌락용이 아니라 예배용입니다. 창조의 목적에 충실한 자에게 하나님은 극상품 행복으로 축복하십니다. 세상은 그 행복을 알지도 못 하고 줄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아니면 바람에 나는 겨입니다. 그 중간은 없습니다. 영적인 포지션에 관한 한 수능 시험의 오지 선다형 문제처럼 이것저것 골라볼 것이 없습니다. 잃어버린 자 아니면 찾은 자입니다. 안에 있는 자 아니면 밖에 있는 자입니다. 선택은 우리에게 있지만 결과는 하나님 손에 있습니다. 마리아처럼 좋은 편을 택하고 영원토록 빼앗기지 않는 축복의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은혜를 사모하는 사람은 실족하는 순간에도 세상 편으로 자빠지지 않고 하나님 편으로 엎어집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심을 확신하는 사람들은 불완전한 인생의 삐걱거림조차 하나님을 찬양하는 음악의 일부로 승화시킵니다. 오래 전에 하나님은 당신의 모든 것을 가지고 내 생명 안으로 다이빙 하셨습니다. 이젠 그 사랑을 신뢰하며 우리가 하나님의 성품 안으로 다이빙할 시간입니다. 소극적인 퐁당 신앙이 아니라 적극적인 풍덩 신앙으로 하나님을 섬기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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